미얀마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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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 불교는 미얀마 사회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로, 상좌부 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바간 왕조 시대에 불교가 널리 수용되었고,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상좌부 불교가 확립되었다. 12세기에는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어 동남아시아에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18세기에는 꼰바웅 왕조에서 스리랑카 불교의 아마라푸라 파가 성립되었다. 20세기에는 제5·6 결집의 개최와 위빠사나 명상을 통한 상좌부 불교의 세계적 보급을 통해 상좌부 불교의 개혁과 보급을 주도했다.
미얀마 불교는 띤잔, 석가탄신일 등 다양한 축제를 통해 나타나며, 불상 숭배, 공덕 쌓기, 명상 등의 종교적 관행이 이루어진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특히 7세 이상의 아이들이 신뷰 의식을 통해 승가에 입회하는 것은 중요한 문화적 관습이다.
독립 이후, 미얀마의 불교는 정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슬람 혐오와 불교 민족주의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미얀마 인구의 약 90%가 불교를 믿으며, 불교는 미얀마 사회의 통합과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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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전통 신앙에서 인간적 면모와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존재인 낫은 다양한 지역에서 숭배되며 불교와 융합되어 미얀마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낫 쁘웨와 타웅비욘 낫 축제, 포파산 낫 축제 등 다양한 의례와 축제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도 미얀마 사람들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얀마의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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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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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테라바다 불교 |
언어 | 버마어 및 기타 언어 |
인구 통계 | |
인구 | 약 4,800만 명 (2016년) (90%) |
추가 정보 | |
관련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관련 장소 | 미얀마 전역 |
2. 역사
12세기 바간 왕조 때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었다. 상좌부 불교는 동쪽으로 교세를 넓혀 동남아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상좌부 불교 확립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대승 불교, 밀교, 힌두교 등도 널리 수용되었다.[195]
18세기 꼰바웅 왕조 보도파야 왕 때인 1800년경, 수도 아마라푸라에서 스리랑카에서 온 일행을 맞이하여 국왕 임석 하에 수계식이 거행되었고, 이를 통해 스리랑카 불교의 아마라푸라 파가 성립되었다.[195]
1871년 민돈 왕 때 새로운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이 거행되었다. 레디 사야도가 연구와 교육을 한 것도 이 시기이다.
1886년 버마가 영국(영국령 인도)에 병합되면서 레디 사야도는 몬유와 북부 레디에 "레디 승원"을 설립하여 지도, 교육,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11년 인도 총독부로부터 칭호를 받았고, 1913년부터 팔리어 성전 협회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버마 불교와 상좌부 불교 선양에 기여했다.
마하시 사야도가 연구와 연찬을 쌓은 것도 영국 통치 하에서였다. 1941년 일본군의 버마 침공으로 마하시 사야도는 고향 세이쿤 마을의 마하시 승원에서 명상 지도를 시작했다.
1954년 불멸기 2500년을 기념하여 양곤(랑군)에서 제6차 결집이 거행되었고, 마하시 사야도가 질문자와 최종 편집자를 맡았다. 파욱 세야도가 학문 생활을 한 것도 이 시기이다.
2012년경부터 미얀마의 다수 불교도와 소수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과 충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세계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2. 1. 초기 역사
버마의 초기 불교 역사는 해독하기 어렵다. 팔리어 역사 연대기에서는 아쇼카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기원전 228년경에 두 명의 비구 소나와 우타라를 ''수반나부미''("황금의 땅")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은 고대 동남아시아의 어딘가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하부 버마의 타톤 또는 태국의 나콘 파톰일 것이다.[8]

서기 3세기경의 안드라 이크슈바쿠 비문은 키라타족(Cilatas)의 불교 개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9] 이들은 고대 아라칸과 하부 버마(즉, 퓨 국가와 몬 왕국)의 몬-크메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다. 3세기 중국의 기록에는 사람들이 부처를 숭배하고 "수천 명의 스라마나(sramana)"가 있던 "류양 왕국"이 언급되어 있다. 이 왕국은 버마 중부에 위치해 있었다.[10]
4세기까지 대부분의 퓨족은 주로 불교도가 되었지만, 고고학적 발견은 그들의 불교 이전의 관습이 그 이후 수 세기 동안 확고하게 남아 있었음을 증명한다. 발굴된 기록과 중국 기록에 따르면, 퓨족의 지배적인 종교는 테라바다 불교였다.[11][12]
피터 스킬링은 퓨 스리 켁트라 왕국과 드바라바티의 몬 왕국에서 테라바다가 지배적으로 존재했다는 확고한 금석문 증거가 "서기 5세기경부터"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으며, 마하야나도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고 덧붙였다. 금석문 증거는 이 지역에서 발견된 팔리어 비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남인도 팔라바 문자의 변형을 사용한다.[13]
실제로, 팔리어로 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불교 경전은 퓨 도시 국가인 스리 켁트라에서 나왔다. 서기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텍스트는 순금 판에 쓰여졌다.[14] 이 판에 사용된 문자가 안드라-쿤탈라-팔라바 지역의 문자와 유사하다는 것은 버마의 테라바다가 이 남인도 지역에서 처음 유입되었음을 나타낸다.[15]
스킬링에 따르면 퓨족과 몬족의 왕국은 "아누라다푸라와 같은 동시대의 중심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자체적으로 불교 문화의 번성하는 중심지였다."[13] 이러한 몬-퓨 불교 전통은 12세기 말까지 버마에서 지배적인 형태의 불교였으며, 이때 신 우타라지바가 스리랑카의 마하비하라 종파를 버마로 들여오는 개혁을 이끌었다.[16]
2. 2. 바간 왕조 시대
12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었다. 상좌부 불교는 동쪽으로 교세를 넓혀 동남아시아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상좌부 불교 확립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대승 불교, 밀교, 힌두교 등도 널리 수용되었다.[195]2. 3. 분열 시대 (14~16세기)
타빈슈웨티(재위 1531–1550)와 바잉나웅(재위 1551–1581)과 같은 역동적인 지도자들의 지휘 아래 타웅우 왕조는 16세기에 미얀마의 모든 지역을 통일했다.[70] 타웅우 왕조는 상부 미얀마의 많은 인구와 유럽식 화기를 이용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71]타웅우 군주들은 마하비하라 테라바다 전통(싱할라 상가)을 후원했다. 제1 타웅우 제국 시대에 타웅우 왕들이 이끄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으며, 상부 미얀마와 샨 지역의 불교를 마하비하라 전통에 따라 표준화하려 했다. 이러한 개혁은 담마제디의 개혁을 모델로 했다.[72]
개혁 이전에는 샨 지역과 상부 미얀마의 불교는 애니미즘, 아리 불교 및 불교 이전의 의례주의(동물 및 인신 제사 포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73] 심지어 테라바다가 더 우세했던 하부 미얀마에서도 낫 숭배와 아리 불교의 관습이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다.[73]
바잉나웅은 제국의 종교적 관습을 정통 스리랑카 마하비하라 전통(싱할라 상가)에 더 부합시키려 했다. 바잉나웅은 팔리어 경전을 배포하고, 학문을 장려하고, 제국 전역에 파고다를 건설했다.[72] 그의 치세에 건설된 주요 사원 중 하나는 페구의 마하자디 파고다였다.
바잉나웅은 또한 종교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칼리야니 계단실에서 싱할라 상가에 대한 대규모 서품을 장려했다.[72] 그는 또한 왕국 전역에서 모든 인신 제사와 동물 제사를 금지했다. 특히 그는 ''사오파''의 장례식에서 노예와 동물을 죽이는 샨족의 관습을 금지했다.[74] 그는 또한 샨 지역에서 설법하도록 미얀마 테라바다 승려들을 파견했다.[7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사담말람카라, 담마붓다, 아난다(''담마상가니''' 아비담마마티카에 대한 주석으로 알려짐)와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다.[76]
2. 4. 따웅우 왕조 시대 (1510~1752)
보다우파야 왕은 승려 복장에 대한 논쟁에서 두 어깨를 덮는 것을 지지하여 상가를 수담마 니카야로 통합했다.[93][87]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보다우파야는 규율과 경전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목표로 상가를 개혁했는데, 이를 수담마 개혁이라고 한다. 그는 상가라자를 임명하여 수도원 규율을 유지하게 했다.[93][87] 또한 상가 수장(''사사나바잉'')을 임명하여 승려를 심사하고 파문할 권한을 주었다.[87]왕국 전역에서 매달 비나야(vinaya) 암송이 이루어졌고, 승려 시험도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88] 보다우파야는 불교 교단에 많은 기부를 했으며, 아마라푸라에 수도원과 파고다를 건설하고 동물 보호구역을 만들었다.[89] 또한 학식 있는 불교 원로들을 위해 많은 수도원을 지었다.[90] 이 시대의 학자 냐나(Ñāṇa)는 ''네티파카라나'', ''자타카타'', ''디가 니카야'' 주석 등 많은 작품을 저술했다.[91]
보다우파야는 승려들을 지방으로 보내 수도원 기준을 시행하고 법을 설파하게 했다.[92] 그의 정책은 이단 종파를 박해하고, 스리랑카에 우파삼파다 서품을 재도입하여 아마라푸라 니카야를 설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93] 또한 일반 대중의 윤리를 규제하여 수도에서 술, 아편, 대마초, 동물 도살을 금지하고, 우포사타일에 5계와 8계를 지킬 것을 호소했다.[94]
꼰바웅 왕실은 수도원장 임명, 수도원 시험 실시, 삼장 정화, 선교사 파견, 불교 법전 발행, 술 금지, 이단과 무슬림 탄압, 동물 도살 금지, 37명의 낫(nat) 판테온 승진 등 다양한 종교 문제에 관여했다.[95] 꼰바웅 시대에는 미얀마 지적 생활과 수도원의 주요 개혁이 이루어졌고, 미얀마 최초의 국가 역사가 쓰였다.[96] 이 시대에 ''타타나-운-타''(''사사나밤사'', "불교 종교 연대기")가 쓰여졌다(1831).[97]
꼰바웅 시대 승려들은 경전 주석을 썼고, 냐나비밤사는 디가 니카야 부주석 등을 저술했다.[98] 팔리 불교 작품의 미얀마어 번역이 증가했고, 수타 피타카 대부분이 미얀마어로 제공되었다. 현대 인쇄 방법으로 불교 경전이 널리 보급되었다.[99]
꼰바웅 시대에는 음주가 꺼려졌고, 공개 음주는 절인 차를 마시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주요 도시에서는 고기 도살 및 판매가 중단되었고, 아편, 도박, 매춘, 사냥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100] 마을에서는 의례가 표준화되었고, 테라바다 불교가 낫 숭배에 대해 우월성을 확립했다.[101]
이 기간에 최초의 위파사나 명상 스승들이 나타났다. 와야-자우타 승려는 아나미 수준의 깨달음을 약속했고,[102] 메다위(1728–1816)는 미얀마어 위파사나 명상 매뉴얼을 저술하여 존재의 세 가지 표식을 다섯 가지 요소와 관련지었다.[102] 그는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을 강조했다.[102]
꼰바웅 시대에도 비불교 의식과 관행(조상 숭배, 힌두교 신, 낫 영 숭배)은 계속되었다.[103]
2. 5. 꼰바웅 왕조 시대
18세기에 성립된 꼰바웅 왕조 보도파야 왕 치세인 1800년경, 당시 수도 아마라푸라에서 스리랑카에서 온 일행을 맞이하여 국왕 임석 하에 수계식이 거행됨으로써 스리랑카 불교의 아마라푸라 파가 성립되었다.[195]1871년, 민돈 왕 치세에 새로운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이 거행되었다. 젊은 시절의 레디 사야도가 연구·교육을 행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1886년, 버마가 영국(영국령 인도)에 병합된 것을 계기로 레디 사야도는 몬유와 북부 레디에 "레디 승원"을 설립하여 지도, 교육,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1911년에는 인도 총독부로부터 칭호를 받았으며, 1913년부터는 팔리어 성전 협회와 서신을 주고받는 등 버마 불교, 상좌부 불교 선양에 기여했다.
2. 6. 민돈 왕의 통치 (1853~1878)
민돈 민 왕은 미얀마 불교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1852년 영국이 lower 버마를 점령한 후 왕위에 오른 그는, 비교적 평화로웠던 재위 기간 동안 왕국을 근대화하고 상가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104]제2차 영국-버마 전쟁 이후, lower 버마 출신의 많은 승려들이 만달레이로 피신했다. 민돈 왕은 이들에게 lower 버마로 돌아가 불교를 가르치도록 설득했고, 일부는 실제로 돌아갔다.[104] 그러나 lower 버마의 많은 승려들은 왕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옥포 사야도는 상가가 승가의 규율을 엄격히 지키면 세속 권력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가르쳤으며, 그의 사상은 Upper 버마에서도 인기를 얻었다.[105]
한편, Upper 버마에서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를 떠나 사가잉 언덕으로 이동하여 더 엄격한 수도 생활을 추구했다. 이 지역은 엄격한 수도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106] 넷트윈 사야도와 띵가자 사야도는 명상 수행과 엄격한 비나야 준수를 강조했다.[102][107][108]
민돈 왕은 불교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하여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제5차 불교 회의를 후원하고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팔리 경전이 낭송 및 편집되어 새로운 판본이 만들어졌고, 필사 오류가 제거되었다. 이후 민돈 왕은 팔리 경전의 새 판본을 새긴 729개의 석판 컬렉션을 만들도록 후원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책으로 남아있다. 석판들은 Kuthodaw Pagoda 단지 내 729개의 작은 탑에 보관되었다.[109]
민돈 왕의 통치 기간에는 새로운 학술 저작과 팔리 텍스트 번역도 이루어졌다. 왕의 스승인 Ñeyyadhamma는 Majjhima Nikaya에 대한 부주석을 썼고, Paññasami는 ''Silakatha'' 및 ''Upayakatha''와 같은 팔리 작품을 썼다.[110] 또한 민돈 왕은 동물 보호 구역을 설립하는 등 불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111]
1871년에는 민돈 왕의 치세에 새로운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이 거행되었다.[195]
2. 7. 영국 식민 통치 시대
영국 식민 통치 (1824-1948) 기간 동안, 정부 정책은 대체로 세속적이었다. 이 때문에 불교와 그 기관은 식민지 정부의 후원을 받지 못했고, 승려들이 계율(비나야)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았다.[113] 기독교 선교사와 선교 학교가 널리 퍼지면서,[114] 식민지 버마에서 불교도, 기독교인, 유럽인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승가의 권위와 위신이 서구 교육을 받은 식민지 엘리트에게 넘어가면서, 식민지 시대 버마 불교도들 사이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사사나'')이 쇠퇴하고 소멸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115][116]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마 승가의 전통적인 역할, 특히 교육이 세속 기관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다.[117]
이러한 쇠퇴 인식에 대한 반응은 식민지 상황에 대응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개혁 운동이었다. 여기에는 불교 출판, 설법, 수백 개의 재가 불교 단체 설립, 채식주의, 불교 교육, 도덕 및 종교 개혁 장려, 학교 설립 등이 포함되었다. 학교 교사, 서기, 상인 등 노동 계급의 재가 신도들이 이 불교 부흥 운동에 참여하여, 이전에는 왕과 왕족 엘리트가 맡았던 ''사사나''를 보존할 책임을 맡았다.[118][116]

이 부흥 운동의 중요한 부분은 불교 교리 학습 (특히 아비담마)과 명상 수행을 결합한 것이었다. 레디 사야도 (1846–1923)는 위파사나 운동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불교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여겨지는 가르침과 설법을 위해 널리 여행했으며, 수많은 재가 신도 연구 및 명상 그룹을 설립했다.[119] 그는 명상 안내서와 ''Abhidhammatthasaṅgaha''의 버마어 운문 번역본인 ''Paramattha Sankhip'' 등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레디에 따르면, 이 텍스트 연구와 명상 수행은 재가 신도조차도 "바로 이 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의 가르침은 우 바 킨, S. N. Goenka, 마하시 사야도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후의 명상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119]
위파사나 운동이 성장하던 시기에 ''weikza-lam''("비전 지식의 길")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구원 체계도 발전했다.[102] weikza 경로의 주요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weikza ("마법사")로서 사실상 불멸을 얻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그 방법과 지향점이 현대 테라바다 정통성의 매개변수에서 크게 벗어나는" 시스템이다.[102]
weikza-do (팔리어: ''vijjā-dhara'')는 불교적 가르침을 지키고 선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비전 능력을 가진 불교 마법사이다. 보 민 가웅과 보 보 아웅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다양한 weikza의 판테온이 존재한다). Weikzas는 미래 부처 미테야의 도착을 기다리고 연금술과 마법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흰색 옷을 입은 평신도로 묘사된다.[102]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수많은 weikza-lam 협회가 설립되었으며, 그중 많은 협회는 의로운 왕 세트야-민이 악을 물리치고 (보 보 아웅과 함께) 미테야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해 황금 시대를 열 것이라는 천년왕국 신화를 믿었다. 다른 weikza 추종자들은 이 신화에 동의하지 않고 단순히 다음 부처를 만날 수 있도록 수명을 연장하기를 원했다. 마법 (치유, 불멸, 마법 보호 등) 수행은 weikza 경로의 핵심 요소이지만, 다섯 가지 계율과 사마타 명상과 같은 규범적인 불교 수행도 중요하다.[102]
기독교 선교사들의 개종 노력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도 있었다. 이 싸움에서 독특한 인물 중 하나는 식민주의와 기독교 선교사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설교자이자 논객이 된 아일랜드 불교 승려 U Dhammaloka였다.[120]
식민지 시대 동안, 버마 국가의 미래는 불교적 가르침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졌다.[121] 버마 민족에게 버마 민족주의는 불교적 정체성과 거의 분리될 수 없었다. 독립 운동의 흔한 슬로건은 "버마인이 된다는 것은 불교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였다.[122]
많은 승려들이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투쟁에 참여했지만, 버마 승가를 이끄는 대부분의 고위 승려들은 승려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그러한 활동을 비나야 규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겼다. 많은 재가 불교 단체와 주요 조직자들도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123] 1906년에 설립된 청년 불교 협회 (YMBA)는 이러한 민족주의 불교 단체 중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 중 하나였으며, 정치화된 승려들과 협력한 최초의 단체였다.[124]
정치적으로 관련된 승려에는 U Ottama와 같은 인물이 포함되었는데, 그는 영국의 통치가 불교 수행에 방해가 되므로 필요하다면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보이콧 및 세금 회피와 같은 간디주의 전술도 장려했다. 그는 폭력 사용을 지지하며, 몇몇 자타카를 인용했다. 그는 여러 번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독립 운동의 순교자가 되었다.[125] 그러나 레어는 수도원 정치 선동이 "이러한 반식민지 정치 참여 또는 사회 운동이 수도원 규칙 위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지적한다.[126] 활동적인 승려들의 명성은 1938년 인도-버마 폭동에서 소수의 승려가 반인도 활동에 참여하면서 더욱 훼손되었다.[126]
2. 8. 의회 시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미얀마의 문민 정부와 군사 정부는 모두 상좌부 불교를 지원했다. 1948년에 설립된 종교부는 미얀마의 불교 관련 사무를 관리했다.[127]미얀마의 초대 총리인 우 누는 불교 사회주의를 장려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127] 1954년, 우 누는 양곤의 까바 에 파고다와 마하 파사나 구하(대동굴)에서 제6차 불교 결집을 소집했다. 2,500명의 승려가 참석했으며, 까바 에 파고다 부지에 국제 불교 고등 연구소를 설립했다.[128]
우 누는 불교를 국교로 만들었다. 연합 의회는 1961년 8월 26일 '''1961년 헌법 제3차 수정안'''( 1947년 헌법을 수정)과,[129] 1961년 10월 2일 '''국교 진흥 및 지원법'''을 통과시켰고,[130] 대통령 마윈 마웅이 이를 시행했다. 우 누는 포살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공립 학교에서 불교 경전을 가르치도록 의무화했으며, 소 도살을 금지하고, 일부 사형을 감형했다.[131]
1962년 네 윈은 우 누의 종교 정책 일부를 되돌렸지만,[132] 우 누는 계속 여행하며 불교를 가르쳤고, 중요한 미얀마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문학가로 남았다.
의회 시대 동안 불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장벽이 되었다. 우 누와 미얀마의 승려이자 철학자인 우 켈라타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철학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3]
2. 9. 버마식 사회주의
네 윈이 이끄는 군부 및 사회주의 정부는 "미얀마식 사회주의" 하에 불교와 사회주의 요소를 섞어 미얀마를 개혁하려 시도했다.[134] 1974년에 채택된 헌법에는 종교를 국교로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135] 군부는 "승려 정화" 개혁의 일환으로 활동가 승려들을 단속했는데, 이로 인해 수도원이 습격당하고 수많은 정치 활동적 승려들이 강제로 승복을 벗고 투옥되었다. 일부 승려들은 심지어 고문을 당했고 옥사하기도 했다.[136]네 윈은 승려들에게 정부에 등록하도록 추진했지만, 미얀마 승려(sanghas)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137] 1980-81년 동안 내무 및 종교부 장관을 역임한 세인 린(Sein Lwin) 장군은 모든 승려에게 정부에 등록하고 자체 신분증을 발급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부적절한" 승려(정치에 관여하는 승려)의 승복을 박탈할 권한을 가진 국가 승가 마하 나야카 위원회(State Sangha Maha Nayaka Committee)를 구성하여 이 나라의 모든 승려를 통치하는 기구로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승려들이 공격받고 박해를 받았다.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와 밍군 사야도(Mingun Sayadaw) 같은 존경받는 인물들조차 새로운 마하 나야카 위원회와 협력하기를 꺼렸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었다.[138]
광범위한 국유화에 기반한 정부의 경제 정책은 미얀마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만들면서 주요 실패로 간주되었다.[139] 이러한 실패와 끊임없는 정치적 탄압은 1988년 8888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으며,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140]
전 미얀마 승려 연합 (ABMA) 소속 승려들을 비롯한 많은 불교 승려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시위대에 대한 단속 과정에서 미얀마 군대에 의해 박해를 받았고, 많은 승려들이 살해되었다.[136][140] 시위 중 혼란 속에서 불교 승려들은 미얀마의 도시와 마을에서 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의 최전선에 있었다(1989년 군대가 통제력을 다시 확립하기 전). 많은 승려들이 쓰레기 수거, 교통 정리, 심지어 치안 유지와 같은 일상적인 업무를 조직했다.[141]
불교 승려들은 군부 정부에 계속 항의했고, 군대는 1990년에 만달레이에서 시위하던 승려들에게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대응했다. 이에 수천 명의 승려들이 군대와 그 가족과 관련된 모든 사람으로부터의 기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의식을 거부했다).[142] 군대는 1990년 말과 1991년 초에 133개의 수도원을 급습하고 수많은 승려들을 체포함으로써 대응했다. 여기에는 U 투밍갈라(U Thumingala)와 같은 존경받는 고위 주지 스님들이 포함되었다. 대부분 강제로 승복을 벗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민주화 운동은 붕괴되었다. 한편, 국가 선전은 군 지도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하고 승려들에게 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43]
3. 현대
현대 미얀마에서 불교는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7년 사프란 혁명 당시 승려들은 군부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아웅산수치의 민주화 운동에도 불교적 가치가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이후에도 불교계는 정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8세기 꼰바웅 왕조 보도파야 왕 때 스리랑카 불교의 아마라푸라 파가 성립되었고,[195] 1871년 민돈 왕 때 만달레이에서 제5차 결집이 열렸다. 1886년 미얀마가 영국에 병합된 후 레디 사야도는 불교 교육과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1911년 인도 총독부로부터 칭호를 받았다. 1941년 일본군 침공 이후 마하시 사야도는 명상 지도를 시작했고, 1954년 양곤에서 열린 제6차 결집에서 질문자와 편집자를 맡았다.
그러나 2012년경부터 불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3. 1. 민주화 운동과 불교
2007년 사프란 혁명에서 승려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군부의 탄압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아웅산수치 여사의 민주화 운동에서 불교적 가치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 이후에도 불교계는 정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18세기 꼰바웅 왕조 보도파야 왕(6대) 치세인 1800년경, 수도 아마라푸라에서 스리랑카에서 온 일행을 맞이하여 국왕 임석 하에 수계식이 거행됨으로써 스리랑카 불교의 아마라푸라 파가 성립되었다.[195]
1871년 민돈 왕 치세에 새로운 수도 만달레이에서 제5 결집이 거행되었다.
1886년 버마가 영국(영국령 인도)에 병합된 것을 계기로 레디 사야도는 몬유와 북부 레디에 "레디 승원"을 설립하여 지도·교육, 저술 활동을 펼쳤고, 1911년 인도 총독부로부터 칭호를 받았다.
1941년 일본군의 버마 침공으로 마하시 사야도는 미얀마 북부 슈와보 서쪽 고향 세이쿤 마을의 마하시 승원에서 명상 지도를 시작했다.
1954년 불멸기 2500년을 기념하여 양곤(랑군)에서 제6 결집이 거행되었고, 마하시 사야도가 질문자와 최종 편집자를 맡았다.
2012년경부터 미얀마 국내 다수파인 불교도와 소수파인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충돌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3. 2. 종교적 관행과 전통
미얀마의 초기 불교 역사는 명확하게 해독하기 어렵다. 팔리어 역사 연대기에 따르면, 아쇼카는 불교 전파를 위해 기원전 228년경 두 명의 비구인 소나와 우타라를 수바르나부미(황금의 땅)로 보냈다. 이 지역은 하부 미얀마의 타톤 왕국 또는 태국의 나콘파톰 주로 추정된다.[8]서기 3세기경 안드라 이크슈바쿠 비문에는 키라타족의 불교 개종이 언급되어 있다.[9] 이들은 고대 아라칸과 하부 미얀마의 몬-크메르어를 사용하던 퓨족이나 몬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세기 중국 기록에는 "류양 왕국"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 왕국은 버마 중부에 위치하며 사람들이 부처를 숭배하고 수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10]
4세기까지 대부분의 퓨족은 불교를 믿었지만,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불교 이전의 관습도 수 세기 동안 남아있었다. 퓨족의 지배적인 종교는 상좌부 불교였다.[11][12] 피터 스킬링은 스리 켁트라 왕국과 드바라바티에서 상좌부 불교가 지배적이었으며, 대승 불교도 존재했다는 증거가 서기 5세기경부터 존재한다고 결론 내렸다.[13] 이는 남인도 팔라바 문자의 변형을 사용한 팔리어 비문에서 비롯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팔리어 불교 경전은 퓨 도시 국가인 스리 켁트라에서 발견된 순금 판에 쓰여진 텍스트이다. 이는 서기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4] 이 판에 사용된 문자는 안드라-쿤탈라-팔라바 지역의 문자와 유사하여, 버마의 테라바다가 남인도에서 유입되었음을 시사한다.[15]
스킬링에 따르면 퓨족과 몬족의 왕국은 불교 문화의 중심지였다.[13] 이러한 몬-퓨 불교 전통은 12세기 말까지 버마에서 지배적인 불교 형태였으며, 이후 신 우타라지바가 스리랑카의 마하비하라 종파를 도입하는 개혁을 이끌었다.[16]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인도의 불교 전통은 벵골 만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확산되었다.[17] 12세기 이전에는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가 인도의 불교 전통, 특히 대승 불교와 산스크리트어 사용의 영향을 받았다.[18][19][20] 7세기에 의정은 동남아시아에서 인도 불교의 모든 주요 종파가 번성했다고 기록했다.[18]
고고학적 발견은 버마에서 탄트라 불교, 대승 불교, 힌두교의 존재를 보여준다. 관세음보살, 타라, 비사문천, 하야그리바와 같은 대승 불교 인물들이 퓨족과 바간의 도상학에 포함되었다.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 가루다, 락슈미와 같은 브라만교 신들도 발견되었다.
3. 2. 1. 축제
미얀마의 미얀마 문화는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1년 내내 많은 미얀마 전통 축제가 있으며, 대부분 불교와 관련이 있다.[158] 일반적인 활동으로는 탑이나 지역 수도원 방문, 승려에게 음식 기증, 팔계 준수, 퍼레이드 참석 등이 있다.
미얀마의 설날(''띤잔'')은 물의 축제라고도 불리며, 그 기원은 인도 전통에 있다. 또한 많은 미얀마 소년들이 특별한 성인식인 ''신뷰''를 기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성인식을 통해 소년은 짧은 기간 동안 사마네라로 수도원에 들어간다. 띤잔은 보통 4월 중순에 있으며, 미얀마의 공휴일 목록의 맨 위에 있다.
석가탄신일은 카손 보름날이라고도 불리며, 부처의 탄생, 깨달음, 열반을 기념하기 때문에 모든 휴일 중에서 가장 신성한 날이다. 불교 신자들은 승려에게 자선을 베풀고, 팔계를 지키고, 명상을 하고, 갇힌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으로 이를 기념할 수 있다.[159] 카손은 또한 보리수 물주기 축제 (''냥예-툰'') 동안 보리수에 물을 주는 것으로 기념된다.[158] 다른 인기 있는 축제로는 담마세키야 데이 축하 행사, 빛의 축제 및 탑 축제가 있다.
전국에서 열리는 탑 축제 (ဘုရားပွဲ|파야 풰my)도 보통 보름날에 열리며, 대부분 쉐다곤 파고다를 포함하여 타바웅 (2월/3월)의 보름날에 열린다.[158] 이 축제들은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온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소달구지 행렬로도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지역 상인과 떠돌이 상인 모두 음식 가판대, 레스토랑, 무료 야외 무대 공연 및 극장 홀 사이에 상점과 가게를 차리는 대규모 시장 박람회로도 기능한다.
3. 2. 2. 숭배와 헌신
미얀마 불교 신자는 보통 집에 부처님을 위한 제단이나 사당을 두는데, 최소한 하나의 붓다상(''buddharupa'')을 모신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 또한 주요 전당에 더 큰 부처님 상을 모시는데, 때로는 부처님의 제자인 사리풋타와 마하목갈라나의 조각상이 부처님 상 옆에 놓이기도 한다.붓다상은 흔히 ''고 팔린''(ဂေါ့ပလ္လင်my, 팔리어의 ''pallanka''에서 유래)이라고 불리는 "왕좌" 위에 놓인다. 꽃, 촛불, 음식 및 기타 공물은 붓다상 앞에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160]
붓다상을 숭배에 사용하기 전에, ''붓다아비세카'' 또는 ''아네이 가자 틴'' (အနေကဇာတင်ခြင်းmy)이라고 불리는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봉헌해야 한다.[161] 이 봉헌은 불교 승려가 주도하며, 다양한 공물(촛불, 꽃 등)과 ''파리타'' 및 ''aneka jāti saṃsāraṃ'' ("수많은 생의 윤회를 통해 나는 방황했다")과 같은 구절, 즉 담마빠다의 153번째 구절(11장에 수록)을 읊는 것을 포함한다.[162][163][164]
봉헌 의식은 붓다상에 불행으로부터 주변을 보호하고 붓다의 힘을 상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신성한 자질을 부여한다고 여겨진다.[165]
집이나 사원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헌신적 실천에는 삼보에 귀의(일반적으로 대중적인 주문을 암송함), 주요 경전 구절 암송(예: ''빠리따''의 ''망갈라 숫타'' 및 ''멧따 숫따''), 합장하며 공손히 인사하기(''안잘리'')와 "다섯 지체의 예배"가 포함된다.[160] 불교 경전 암송은 미얀마 불교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한 행사에서도 행해진다.
3. 2. 3. 윤리와 공덕
미얀마 불교 수행의 핵심 요소는 공덕(팔리어: ''푼냐'')을 쌓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불교 승려에게 음식과 기타 물품을 기증하는 것과 같은 특정한 선행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160] 불교도들은 선한 행위(''쿠살라 업)가 현세와 다음 생에서 좋은 업보의 결과(''팔라'')를 낳는다고 믿는다.[160]
미얀마 불교 윤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계율" 또는 "수행"을 지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계율은 다섯 가지 계율(살생, 도둑질, 거짓말, 간음, 음주를 삼가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 공휴일, 우포사타일, 명상 수행 기간 동안 미얀마 신자들이 가끔 지키는 추가 계율(팔계)이 있다. 불교 승려에게 팔리어로 계율을 외우며 신자에게 계율을 부여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다.
음력 관찰일 또는 우포사타(일반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발생)에는 불교 신자들이 추가 계율을 지키고 불교 사찰을 방문하여 공덕을 쌓고 더 집중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160]
또 다른 일반적인 관습은 불교 승려들이 평신도와 젊은 승려들에게 설법이나 "담마 담화"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공덕이 되는 활동으로 여겨진다. 미얀마 승려들은 종종 평신도에게 "부채질하며 하는" 설법이라고 불리는 격식 없고 대화적인 방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며 유머를 포함할 수 있다. 이는 팔리어로 행해지고 평신도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었던 더 오래되고 의례적인 "부채질하며 하는"(승려들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방식을 지칭) 설법과 대조된다.[166]
대부분의 미얀마인들은 고기를 먹지만, 일부 저명한 미얀마 불교 승려들은 자비로운 식단으로서 채식주의를 장려해 왔다. 이러한 인물로는 인기 있는 타마냐 사야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메타를 기르는 유용한 방법으로 채식을 장려한다.[167] 마하시 사야도 역시 식사가 "세 가지 방법으로 순수"하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채식을 권장해 왔다. 이는 부처님이 규정한 규칙으로, 승려가 동물을 위해 특별히 죽였다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심하지 않는 경우에만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168] 미얀마 불교도들은 또한 동물을 죽이는 직업은 잘못된 생계이므로 일반적으로 피한다.[169]
3. 2. 4. 명상
불교 명상은 미얀마에서 널리 행해지는 대중적인 불교 수행법이다. 재가 신자와 출가 수행자 모두 명상을 한다. 전통적으로는 대부분의 재가 신자와 승려는 명상에 집중하지 않았지만, 20세기 대중 재가 명상 운동 (일명 "위빠사나 운동")의 성장과 함께 이러한 경향이 바뀌었다. 이 운동은 마하시 사야도, 우 누, 우 바 킨과 같은 인물들이 이끌었으며, 재가 신자도 명상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장려했다.[170]
미얀마 전역에는 많은 명상 센터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가장 큰 곳인 마하시 타타나 예익타이다.[171] 또 다른 중요한 초기 명상 센터는 우 바 킨의 국제 명상 센터(I.M.C.)이다. 재가 신자들은 때때로 이러한 센터에서 명상 수련회에 참여하여 엄격한 일일 명상 일정을 따른다.[171] 미얀마는 위빠사나 명상을 통한 상좌부 불교의 세계적 보급을 주도하는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3. 2. 5. 신뷰 (Shinbyu)

미얀마의 모든 부모는 아들이 7세 이상이 되면 신뷰 의식을 치러 불교 승가에 입회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신뷰는 미얀마 문화에서 열두 가지 상서로운 의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상징적인 행렬과 의식은 고타마 붓다의 모범을 따르는데, 세속적인 복장에서 수행자의 복장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고타마 붓다는 시다르타 고타마라는 왕자로 태어났지만, 인생이 고통(두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아라는 개념은 단지 환상(아나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왕실 정원에서 "네 가지 징조"(နမိတ်ကြီးလေးပါး|나밋지레바my) – 늙음, 질병, 죽음, 그리고 수행자 –를 본 후, 충실한 시종 찬다(မောင်ဆန်း|마웅산my)의 뒤를 따라 말을 타고 궁을 떠났다.[1]
모든 불교도는 기본적인 오계(ငါးပါးသီလ|응아바틸라my)를 지켜야 하며, 수계자들은 십계(ဆယ်ပါးသီလ|세바틸라my)를 지켜야 한다.[1] 부모들은 아이들이 삼 개월 이상, 혹은 더 오래 승가의 일원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사원에 머물기를 바란다.[1] 20세가 되면 우파삼파다 수계를 받아 완전한 승려가 되어 227개의 전체 승려 규칙 또는 Pātimokkha를 지키며 평생 승려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1]
3. 2. 6. 바사 (Vassa)
7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의 세 우기 달은 바사( ဝါတွင်း|wàdwɪ́ɰ̃my)로, 사람들이 밭을 갈고 논에 벼를 심느라 바쁘고 비구들은 사원에 머무는 시기이다. 바사 시작 시 비구들에게 새로운 가사가 제공되며, 바사의 끝은 따딩줏 축제로 표시된다.[158]수확 후, 일반적으로 10월 또는 11월에 까티나(kətʰèɪɰ̃)가 다시 제공된다.[158] 우포사타는 띤잔과 바사 기간 동안 재가자들이 팔계를 지키고, 독실한 불교 신자들은 일 년 내내 지킴으로써 준수된다.
부모님과 연장자들은 또한 부처님 자신이 정립한 전통에 따라 사순절의 시작과 끝에서 가족의 젊은 구성원들로부터 경의를 받는다. 바사 기간 동안 부처님은 도리천으로 올라가 천신이 된 어머니에게 감사의 설법을 하였고, 그는 큰 등불 축제와 함께 지구로 환영받았다.[158] 교사들 역시 같은 경의를 받는데, 이는 식민 행정에 반대하여 설립된 국립학교에서 시작된 전통이며, 독립 후에도 국립학교에서도 지속되었다.
결혼식은 종교와 무관하며 승가에 의해 진행되지 않으며, 바사의 세 달 동안 열리지 않는다. 이 관습으로 인해, 결혼을 원하는 커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따딩줏 또는 "와꾯" 이후에 결혼식이 쇄도하게 되었다.
3. 2. 7. 불교 교육
독실한 미얀마 불교 신자들은 자녀를 지역 승원(''캬웅'')에 보내 삼학, 팔리 경전, 고타마 붓다의 일대기, 550개의 자타카 이야기 (특히 38가지 불교의 행복론) 등 불교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승려들은 영국 식민 통치 시대에 세속 학교와 선교 학교가 생겨나기 전까지 젊은이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전통적인 스승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이후 심화된 경제 위기로 인해 승원 학교가 부활했다. 학비, 교복, 교재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무료 승원 교육에 대한 수요를 새롭게 만들었고, 샨족, 파오, 팔라웅, 라후, 와 등 소수 민족이 이러한 부활의 혜택을 받고 있다.[172]
4. 출가주의
미얀마에서 불교 승려는 사회 전체의 숭배를 받는다.[174] 2016년 국가 상가 마하 나야카 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상가는 정식 승려(비쿠)와 수습 승려(사마네라)를 합쳐 535,327명이며, 60,390명의 틸라신(여성 출가자)이 있다.[175]
대부분의 승려는 투담마 니카야 (87.24%) 또는 슈웨진 니카야 (9.47%)에 속하며,[176][177] 그 외 드와라 니카야, 흐네트윈 니카야 등 소규모 승가도 존재한다. 미얀마에는 1990년 법률에 따라 9개의 승가가 법적으로 인정된다.[180] 이들은 교리상 차이는 없지만, 승가 수행, 계보, 조직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181]
밀교의 연금술, 마법, 오컬트 등 비불교적 요소를 통합하는 소규모 밀교 불교 종파 또는 위자도 존재한다.[182] 미얀마 승려들은 주로 적갈색 가사를 입지만, 황토색 가사를 입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인근 상좌부 불교 국가들과는 다른 점이다.
4. 1. 승가

미얀마 사회에서 불교 승려는 숭배를 받는다.[174] 국가 상가 마하 나야카 위원회가 2016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상가는 535,327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식으로 서품된 불교 승려 (비쿠) 282,347명과 수습 승려 (사마네라) 252,962명으로 이루어져 있다.[175] 60,390명의 틸라신(여성 출가자)도 있었다.[175]
미얀마 불교 승려의 대다수는 투담마 니카야(87.24%)와 슈웨진 니카야(9.47%)에 속한다.[176][177] 이 외에도 하부 미얀마의 드와라 니카야, 만달레이의 흐네트윈 니카야 등 소규모 승가가 있으며, 각각 수천 명의 승려를 보유하고 있다.[178][179] 1990년 상가 조직에 관한 법률에 따라 미얀마에는 법적으로 9개의 승가가 인정된다.[180] 이들은 교리상 차이는 없지만, 승가 수행, 계보, 조직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181]
어떤 권위에도 인정받지 않는 소규모 밀교 불교 종파 또는 위자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밀교의 연금술, 마법, 오컬트 등 비불교적 요소를 통합한다.[182]
대부분의 미얀마 승려는 적갈색 가사를 입지만, 일부는 황토색 가사를 입기도 한다. 이는 태국, 라오스, 스리랑카 등 인근 상좌부 불교 국가에서 승려들이 주로 사프란 가사를 입는 것과 대조적이다.
테라바다 불교에서는 비구니(수녀) 계통이 사라졌으며, 여러 기술적, 사회적 이유로 영구적으로 부재한 상태이다. 미얀마 불교 통치 위원회는 현대에 여성의 유효한 서품이 불가능하다고 판결했지만, 일부 미얀마 승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테라바다 국가처럼 여성들은 국가 공인 상가라자나 상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출가자로서 틈새를 만들었는데, 미얀마에서는 이들을 ''틸라신''이라 부른다.[183]
''틸라신''(သီလရှင်|θìla̰ʃɪ̀ɰ̃|my "도덕성을 가진 자", 팔리어 ''sīla''에서 유래)은 ''사마네리''와 같은 서약을 하는 여성 재가 출가자이다. 이들은 태국의 ''매치'', 스리랑카의 ''다사 실 마타''처럼 재가 신자와 승려 사이의 중간 위치에 있다. 그러나 틸라신은 대부분의 매치보다 호의적으로 대우받으며, 훈련, 명상 수행, 승려와 같은 자격 시험을 치를 수 있다.
틸라신은 십계를 지키며, 분홍색 가운, 삭발한 머리, 주황색 또는 갈색 숄, 금속 탁발 승반으로 구별된다. 우포사타 때 탁발하여 쌀이나 돈을 받는다. 존칭으로는 ''사야레'' (ဆရာလေး|sʰəjàlé|my "작은 스승")와 ''도'' (ဒေါ်|dɔ̀my)를 사용한다.
틸라신은 별도 구역이나 꺙(사찰-수도원)에 거주하며, 승려를 돌볼 필요는 없지만 필요시 요리를 돕는다. 승려보다 지위는 낮지만 복종하지는 않는다.
일부 틸라신은 비구니 계통 복원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부와 대중은 유보적이다. 1996년 새로운 테라바다 비구니 상가가 처음 소집된 후 더 많은 여성이 서약을 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여성의 수도자 선택은 틸라신으로 제한된다. 2003년 사카바디와 구나사리는 스리랑카에서 비구니로 서품되어, 현대 최초로 스리랑카에서 고위 서품을 받은 미얀마 여성이 되었다.[184][185]
5. 정치
불교는 미얀마 정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불교 승려와 재가 단체들은 현재까지도 미얀마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
5. 1. 불교와 민족주의
미얀마 민족주의는 1906년 젊은 불교도 협회(YMBA) 결성으로 시작되었다. 불교 승려들은 학생들과 함께 독립 투쟁과 이후 민주주의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 우 오타마, 라카인 주의 우 세이다, 양곤 감옥에서 장기간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우 위사라 등이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다.[186][187]불교 승려들은 종종 정치 시위에 참여하며, 정치인에게 탁발을 거부하여 특정 정치인을 보이콧하기도 했다(이는 그들에게 공덕을 쌓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립 이후, 정부와 개별 정부 인사는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불교를 후원했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보이콧은 미얀마에서 강력한 저항 수단이었다.[188][142]

쉐다곤 파고다는 아웅 산과 그의 딸 아웅 산 수 치가 유명한 연설을 한 대규모 공공 회합의 중요한 장소였다. 1936년 제2차 대학교 파업 동안 학생들은 쉐다곤 테라스에서 야영했다. 민주주의 지도자, 특히 아웅 산 수 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일관되게 불교적 가치에 호소해 왔다.
불교 승려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가장 최근의 시위는 2007년 사프란 혁명이었다. 군사 정권은 가혹하게 탄압하여 수천 명의 승려를 투옥하고, 다른 많은 승려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2008년 11월, 전 버마 승려 연합의 지도자인 우 감비라는 최소 12년의 중노동을 포함하여 6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에 대한 다른 혐의는 아직 계류 중이다.[189] 2009년 초, 그의 형량은 63년으로 감형되었다.[190] 그의 형량에 대해 휴먼 라이츠 워치가 항의했고,[191] 국제 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간주한다.[192] 양 단체는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감비라는 2011-2012년 버마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2012년 1월 13일 대규모 사면을 통해 석방되었다. 그는 2012년 4월에 승려직을 그만두었는데, 전 수감자 신분 때문에 합류할 수도원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2012년에 최소 세 번 재체포되었으며, 2012년 12월 11일 현재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5. 2. 이슬람 혐오와 불교 민족주의
2012년경부터 미얀마 내 다수파인 불교도와 소수파인 이슬람교도 간의 갈등 및 충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국제적으로 널리 보도되고 있다.
6. 인구 통계
미얀마 인구 조사에 따르면 1891년부터 미얀마 인구의 84%에서 90%가 불교를 신봉해 왔다. 불교는 미얀마 인구의 약 90%가 신봉한다.
연도 | 인구 |
---|---|
1891 | 6,888,075 |
1901 | 9,184,121 |
1911 | 10,384,379 |
1921 | 11,201,943 |
1931 | 12,348,037 |
1973 | 17,764,008 |
1983 | 30,520,175 |
2014 | 45,185,449 |
7. 국가 종교의 날
와가웅의 보름날은 "국가 종교의 날"(နိုင်ငံတော်ဘာသာနေ့my)로 기념되는데, 이는 1961년 8월 26일 와가웅 보름날에 "1961년 헌법 제3차 수정법"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2015년, 인종과 종교 보호 협회(마 바 타)는 정부에 국가 종교의 날을 공식적으로 기념할 것을 요청했다.
2021년 8월 26일, 청년 불교 협회(YMBA)는 국가 종교의 날 60주년 기념 행사를 주도했으며, 집집마다 사사나 깃발을 게양하고 소셜 미디어에 깃발 사진을 게시하는 등의 행사가 포함되었다.[193] 2021년 8월 22일, 카렌주 정부는 주지사 우 소 민트 우를 필두로 국가 종교의 날 60주년을 기념하는 공덕 의식에 참석했다.[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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